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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4-29 08:57
견성이란 무엇인가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579  

견성이란 무엇인가

숲에는 강한 바람이 불더니 이제 잠잠해지고 비가 내립니다. 숲이 비바람에 흔들리고 뒤집어져서 까르르 웃는 것이 마치 선잠에서 깨어난 동자승의 미소처럼 해맑아 보입니다. 어느덧 숲은 점점 연두빛 일색으로 번져서 마침내 산꼭대기에 오르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모두가 초록빛 바다와 만나서 해인삼매를 이룰 것입니다.  구산선사의 열반을 일주일 앞두고 큰 사고가 나서  군병원에 입원을 하여 간단한 치료를 마치고 제대를 했습니다. 한편 그 동안 보고 싶었던  경전을 배우려고 승가대학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경복궁 앞에 있는 법련사에 머물렀습니다. 구산선사는 경전을 먼저 보고 참선을 하라고 했지만 성철선사는 참선을 하려면 책을 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워낙 생사가 급하여 봉암사 선방으로 도망을 쳤으나 크게 깨닫지  못했고 군에서 설법을 하는데 너무나 부족해서 불교학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는 시내 포교당은 하루가 바쁘게 돌아가고 보고 듣는 경계마다 다채롭고 거리는 화려하여 변화가 무쌍했습니다. 한편 군에서 겪었던 큰 사고에도 깨지지 않았던 자나깨나 맑은 경계가 여전해서 마치 구름 속을 거니는듯 했고 얇은 비단의 장막 속에 갇힌 것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선정의 덕분에 그간의 군생활을 돌이켜 봐도 불만이나 화를 낸 기억이 없었고 시비에 다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입대 동기는 하는 일마다 불만이 많아 내무반에서 인질을 잡고 총기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다행히 그간  익혔던 선정의 힘으로 위급한 상황을 잘 대처해서 많은 희생을 면할 수가 있었던 것은 군종병으로서 큰 보람이었습니다. 그때 동기는 조기 제대 후 고마운 마음에 전국의 절을 수소문한 끝에 몇년 전에 찾아와서 당시의 감사함을 전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처럼 분노의 상황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자제하는 힘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하는 일마다 시비를 따라서 고통을 달게 받고 살아가니 수행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번뇌가 일어나면 반드시 회광반조하여  실체가 없음을 바로 보아 성품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일어나는 번뇌를  끊어버린 것을 수행이라고 착각하면 마치 무거운 돌로 풀을 누르는듯 답답합니다. 또한 반대로 가볍고 맑은, 아는 기운을 참 성품으로 착각하여 집착하면 얇은 비단의 장막에 갇힌 것과 같아서 현실에서 사리분별이 또렷하지 못하고 흐리멍텅합니다. 이 속에서는 시비가 없어 남들이 보면 도인인가 하는 착각이 들게 합니다. 이러한 참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오히려 변화무쌍하여 시비가 난무하는 도시 가운데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수행이란 한적한 산사에서만 하는 줄 알지만 참다운 수행은 시비속에서 시비를 벗어나는 것으로 진흙 속에서도 물들지 않는 연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수도 서울에서 수도승 생활을 하면서 맑은 비단의 장막 속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왜냐하면 좌선을 한다고 앉으면 무기공에 빠져서 금방 시간이 가지만 답답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동대문 시장으로 하루는 남대문시장으로 마음을 살피는 참다운 시장을 보러 다녔습니다. 때로는 목탁을 치며 탁발을 하다가 타종교인으로 부터 천대를 받고 쫒겨나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도반 스님은 어서 승가대학에 함께 들어가자고 재촉을 했지만 공부는 안하고 시장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후원 공양실의 보살님은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고 구박을 했습니다. 하루 종일 장보러 다닌 장삿속을 모르기에 배가 고픈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시장에서는 새벽부터 밤까지 온통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울고  웃는 시비 속에 휘말리고 얽히는 일이 발생하여 가산을 하루 아침에 탕진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장이야말로 무기력한 정신을 깨우는데는 최고의 수행처입니다. 옛날 어느 선사는 공부가 잘 되는 날은 오늘 장은 잘 봤다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지만 그렇지 못한 날에는 하루해가 가는 것이 억울해서 두다리 뻗고 엉엉 울었다고 했습니다.
바야흐로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다해가는 경복궁에 단풍이 아름다운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절에서는 매주 초중고 학생들 법회가 있었고 대학과 청년부 법회가 주말마다 열렸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청년회 법회날에 선화를 공부한 여자 강사님이 강의를 한다고 류시화 시인이 함께 들어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루에서 듣고 있었는데 강사님이 호로병속의 새 그림을 보여주며 강의를 했습니다. 내용은 병속에서 어린 새를 길렀는데 점점 자라서 꺼내야하는데 병도 깨지말고 새도 죽지않게 꺼내보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화두였습니다.  어느날 남전선사는 육긍대부로 부터 위와 같은 질문을 받고 대부하고 불렀습니다. 바로 대답을 하니 어허 벌써 나왔네 했습니다. 이에 대부는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한편 강사님이 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천지가 무너지는듯 큰소리로 일갈하며 나왔다고 소리를 벽력같이 내질렀습니다.
비로서 유리독 속에 갇힌 맑은 경계가 무너지고 참 성품이 나타나서 세상에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습니다. 이제부터 보는 사물마다 분명하고 들리는 소리마다 또렷또렷했습니다. 비로소 눈과 귀가 열리고 세상은 온통 환희와 광명천지였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끌어안고 일년 가까이 패잔병이 적진을 단숨에 점령하고 만세를 부르며 개선하는 장군처럼 거리를 활보하며 누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깨달음의 환희심은 사라지고 보통 사람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옛날 어느 선사는 길을 가다가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화해하면서 자네 볼 면목이 없네 라고 하는 말에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견성이란 특별한 면목이 아니라 듣고 보고 아는 누구나 차별없이 가지고 있는 별볼일 없는 성품이었습니다. 참으로 그동안 무엇때문에 고생을 했는지 후회스럽고 너무나 싱거운 맛에 허탈했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보고 듣고 아는 대상을 따라가서 아는 성품을 등지고 배반하여 한량없는 윤회의 고통 속에서 살아 갑니다. 한편 금강경에서는 모든 상이 허망하지만 상에서 상이 아닌 것을 보면 보는 것이 바로 여래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보고 듣고 일체처 일체시에 아는 성품인 여래는 깨닫기 전에도 부족함이 없었고 깨달은 후에도 늘어난 것이 아닌 누구나 차별없이 가지고 있는 본래 원만하고 구족한 성품이며 열반경에서 말한 불성었습니다.
성품에는 남녀노소가 없고 늘거나 줄지도 않고 더럽고 깨끗한 것이 없고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또한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지만 보살은 이러한 반야의 성품에 의지하여 일체의 고통을 건너갑니다. 
그간 병속의 새는 거친 번뇌의 구름과 식광의 지해인 미세 망념의 맑은 병속에 갇혀 있었지만 늘지도 줄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행자의 눈을 멀게 하였던 양변의 구름에서 벗어나고 나니 참으로 보통 사람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부터는 그간 숨어 있었던 감정들이 끝없이 일어났습니다. 한편 차라리 식광의 꿈에서 깨지 말았으면 신통의 힘이라도 얻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에 후회스럽고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어나는 번뇌속에 번뇌가 아닌것이 함께 있었습니다. 모든 보고 듣는 대상속에 상이 아닌 불성이 있었습니다. 
봉암사 조실 서암선사는 이제 다시 살얼음을 밟듯이 일거수 일투족 방심하지 말고 보림을 하라고 했습니다.
보조국사님은 수심결에서 수행하는 사람이 각고의 정진 끝에 문득 나의 성품이 위로는 부처님과 더불어 역대 조사와 둘이 아님을 깨달았지만 이제 갓 태어난 어린 아이와 같다고 했으니 이것을 해오라고 했고 선가에서는 초견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른과 같은 공력을 쓰기위해서는 온 종일 일마다 일어나는 생각마다 살피고 알아차려서 온전하게 보림하여 자유자재함을 증득하면 성불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끝없이 돌이키고 살펴서 무거운 업력을 녹이고 보살행을 실천하여 복과 지혜가 원만히 구족해야 어른과 같은 공력을 쓸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오후 수행인 보림이라고 합니다.
어제는 절 가까운 곳에 있는 중학교에서 학생들이 답사를 왔습니다. 그래서 안내를 해주었는데 한 학생이 스님은 언제부터 절에 사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중학교 이학년때 집을 나와서 지금도 중 학생으로 살고 있다고 하니 한참 지나서 알아듣고 웃었습니다. 수행자는 끝없이 자신을 버리는 학생으로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청소년기를 보낸다는 것은 힘이 들고 고통이 많을 것입니다. 각자 방황의 색깔과 무게는 다르지만 알을 깨고 나오려는 몸부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린 숲은 강풍이 불고 비바람이 몰아쳐야 뿌리가 깊어지고 잎이 무성해집니다.
한편 누구나 가지고 있는 천진한 성품은 부처님과 차이가 없지만 울고 웃는 시장통에서 철저한 단련을 통하지 않으면 지혜와 복덕이 원만한 불공덕을 이룰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쇠가 용광로에서 거듭 단련되어 가지가지 도구의 모양을 나투는 것과 같습니다.
이치라는 측면으로 보면 본래 부처여서 닦을 것이 없는 돈오돈수지만 현실의 입장에서는 갓 태어난 아이나 어른이 사람인 것은 같지만 공력의 입장에서는 천지 차이가 있듯이 돈오점수입니다. 한편 깨치기 전에 수행은 아무리 많은 체험을 하고 신통을 얻었다고 해도 참다운 수행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깨닫고 나서 수행이 더 어렵다고 하는 것은 지견인 미세 망념을 뛰어넘는 공부를 마쳐야 일없는 대장부가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한생각 번뇌가 일어나면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욕망을 따라가 자기의 성품을 등져버려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순간 포착해서 알아차리면 바로 천진한 불성이 나타납니다. 이 작업이 쉽지않고 지난한 것은 중생심이라는 업력이 마치 어린 아이처럼 끝없이 칭얼대고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잔인했던 사월이 가고 가정의 달 오월이 다가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19의 터널속에서 가족들끼리 서로서로 감싸주기를 부처님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산에는 고사리가 여린 주먹을 쥐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제 절마다 연등이 걸리고  부처님 오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모두에게 희망과 치유의 등을 달아야 겠습니다.

옥집의 달이 청정한 
불두화를 삼키니
숲은 뒤집어질듯
박장대소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