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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6-19 16:30
제5차 세계선차아회 발표 논문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126  
원표와 가지산문의 선차정신
박 정진(‘차의 세계’편집주간, 문화인류학박사)
1. 원표(元表)대사의 한국 불교사적 위치
2. 가지산문과 원표, 도의 그리고 선차계보
3. 도의국사 및 보조체징
4. 선차정신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
―심물존재, 심물자연의 입장에서 본 선차정신
1. 원표(元表)대사의 한국 불교사적 위치
지난 ‘제 1회 원표대사 국제학술대회’(2013년, 보림사) 때는 원표대사와 관련된 중국과 한국의 기록을 근거로 그의 불교사적 의미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토론을 하였다. 이번 제 5차 선차아회 ‘가지산파 차 문화전승’을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보림사의 선차정신은 어떻게 전승되었을까를 주제로 삼아보았다.
흔히 역사적 인물을 연구할 때는 기록을 토대로 연구하는 것이 보편적인 연구방법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자료가 부족하거나 그 자료가 신화나 전설로 전승되었을 때는 실증적인 연구는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한 분과학문의 독점적인 연구가 아니라 여러 학문의 학제적(學際的)․통섭적(統攝的)인 연구가 요청된다.
더욱이 역사적 연구, 특히 실증적 연구라는 것이 과학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자료의 해석에서 단선적으로 인해 일방통행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그것을 보완하는 방법이 바로 다선적인 연구이다. 그러나 다선적인 연구라고 해도 연구자의 관점이 들어가 있는 것이고 보면, 결국 해석학에 머물 수밖에 없다.
신라 경덕왕 시기(天寶年間, 742∼ 756)에 당나라를 거쳐 인도로 갔다가 돌아온 원표(元表, 생몰년 미상)대사에 대한 기록도 매우 소략하기 때문에 충분한 연구를 하기에 불충분하다.
경덕왕은 원표대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왕명으로 1천 칸의 불궁(佛宮)을 시설하고 장생표주(長生標柱)를 세워(경덕왕 17년, 759) 성역(聖域)으로 지정해줬다고 한다. 이 기록의 중요성은 지난 대회 때에 여러 발표자에 의해 부각된 바 있다.
그동안 가지산문과 관련해서 제기된 학문적 과제를 정리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가지산을 개창한 것은 도의인가, 원표대덕인가.
②원표는 보림사를 인도와 중국의 보림사와 비슷하게 개창했다고 하는데 인도의 보림사나 6조 혜능의 보림사를 이미 두루 섭렵한 원표는 선승이 아닌가.
③그런데 『송고승전』에 보이는 신라승 원표는 왜 해동 신라인이 아니고 고구려인으로 되어 있는가.
④도의가 개창했다고 하지만 가지산문의 사실상 개산조는 3대 보조체징이 아닌가.
위의 여러 논란은 부분적으로 정리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미해결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대회 때의 대체적인 결론을 정리해보면 원표대덕은 도의국사보다는 빠른 시기에 신라에 입국하였지만 온전한 선종승려라기보다는 화엄종과 선종의 사이에 있었던 화엄선(華嚴禪)의 승려로 봄이 타당한 것으로 보였다.
이 같은 결론은 자연스럽게 가지산문 개산조, 혹은 보림사 개창조의 문제로 이어진다. 이 경우 역사를 연속적으로 혹은 단속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입장이 달라진다. 크게 보면 가지산문의 개산조는 도의국사이지만, 실지로 보림사와 관련해서는 이에 앞선 원표대사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보림사 개창조는 이곳에 처음 절을 지은 원표대사로 봄이 타당할 것 같다. 보조체징은 가지산문 중흥조가 된다. 결국 산문과 개 사찰의 개창을 분리하는 셈이다.
원표대사: 화엄선 보림사 개창조
도의국사: 가지산문 개산조
보조체징: 가지산문 중흥조
원표대사가 고구려인으로 기록된 것은 삼국통일 후에 자연히 신라인으로 편입되기는 하였지만 그의 출신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고구려 출신인 것은 중국 대륙에서도 이름을 드높인 화엄종의 출중한 승려임에도 불구하고, 신라 화엄종에서는 주도권을 의상대사(625∼702)와 그 제자들에게 빼앗긴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보림사 조사전 바로 옆에 있는 산신각 비슷한 건물에는 매화를 들고 있는 소녀와 함께 연꽃을 들고 있는 좌상의 보살상이 그려진 ‘수호가람매화보살지영’이 걸려있다. 이 매화보살은 부석사에 전해지는 의상과 선묘낭자의 얽힌 전설과 흡사하다.
의상이 귀국한 때가 670년이고 부석사를 창건한 시점이 676년이니 그렇게 보면 남종선의 원류인 혜능이 선종을 퍼트린 때와 의상이 중국 화엄종의 원류인 장안 종남산 지상사에 머물며 『화엄일승법계도』를 구상한 시점이 겹친다.
화엄종과 선종은 중국과 한국에서 시기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그러한 사정이 원표 대사의 일생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는 확실히 화엄종과 선종의 사이에 있는 승려로서 가장 훌륭한 발자취를 남겼다.
본래 화엄종 승려였던 원표대사에게 미친 선종의 영향은 그가 귀국하기 전에 6조 혜능의 보림사를 찾았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현봉스님(玄鋒, 송광사 전 주지)은 창건설화라는 입장에서 잘 정리하였다. 현봉의 주장은 ‘육조 혜능의 보림사 신화의 변형과 변주’라는 것이다.
“보림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창성탑비 884년에는 가지산문이 개산되기 이전에 이미 가지산사(迦智山寺)라는 도량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교 연경도서관(燕京圖書館)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세조(世祖) 3∼10년(1457∼ 1464)에 간행된 《신라국무주가지산보림사사적기(新羅國武州迦智山寶林寺事蹟記)》와 그보다 더 후대에 이루어진 《보림사중창기(寶林寺重刱記)》 등에는 창건(創建)의 연기설화(緣起說話)가 기록 되어 있다.”
위와 같이 주요 기록을 조망한 그는 원표대사 전설의 개요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거기에는 ‘인도에 유학(遊學)하던 원표(元表) 대덕(大德)이 월지국(月支國)에 보림사를 창건하였으며 중국에서도 비슷한 산세를 보고 절을 세워 보림사라 하였는데, 신이(神異)한 기운이 삼한(三韓)에서 비쳐오므로 그 기운을 따라 바다를 건너와서 진경(眞境)을 찾으니 지형이 기묘하게도 인도와 중국의 보림사와 같으므로 불궁(佛宮)을 세우고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라 하였다’고 한다.”
현봉은 결국 “그런데 창건 설화에 원표가 인도에서 유학할 때 월지국(月支國)에 보림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오지만 그 무렵 월지국은 이미 멸망했으니 월지국 옛 지경의 보림사에 잠시 머물렀다는 뜻일 것이다. 또 인도에서 중국으로 돌아와서 머물렀다는 중국 지제산에는 보림사가 없다.”고 지적하고 결국 문헌사학자의 입장에서 결국 창건설화라고 단정한다.
결국 역사는 한 인물로 하여금 신화적 인물이 되게 하였고, 그 신화는 오늘에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다. 원표대덕은 인도․중국 유학을 통해 어느 정도 화엄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나 그보다 6조 혜능의 보림사에서 초기 남종선의 맛을 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난 대회 때에 원표 대사와 관련해 국내에 소개 된 자료는 다음과 같다.
《송고승전(宋高僧傳)》<元表傳>
《보림사사적기(寶林寺事蹟記)》
(하버드 옌칭 도서관에서 발견)
<나라암비기(那羅岩碑記)>
<삼산지(三山志)>
<지제산지(支堤山志)>
<영덕현지(寧德縣志)>
이 자료에서 선차의 계보를 복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실정이지만 징검다리 형식으로나 엿보고자 한다.
2. 가지산문과 원표, 도의 그리고 선차계보
가지산문의 계보는 주지하다시피 도의국사―염거화상―보조체징으로 이어진다. 그런 후에 그 계보는 신라시대를 뛰어넘어 고려 후기의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로 이어진다. 보림사는 개창조의 논란과 함께 그 중간에 상당기간 계보를 잃어버리다가 현재 조계종의 중흥조인 태고보우스님이 신돈과의 알력으로 이곳에 머물면서(1363년) 가지산풍을 떨친 인연으로 오늘날 조계종의 중심 선찰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말하자면 조계종 종조와 중흥조와 관련되는 사찰로 선차의 중심에 서 있다.
따라서 가지산문의 선차정신을 탐구하는 것은 한국 불교의 선차정신을 드높이는 일과 직결된다. 현재 가지산문의 선차와 관련된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후학들의 지속적인 천착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원표대덕은 실은 정중중의 무상선사(無相, 684∼762)와 동시대인이다. 무상선사는 동아시아 선종의 개창기에 중국 사천지방에서 지선(智詵)의 검남종의 계승자로 정중종을 개창한 대선사였지만, 원표대덕은 화엄종의 세례를 흠뻑 받은 승려로서 중국 복건성·절강성 일대에 이름을 떨친 화엄종 승려였다.
그러나 그는 인도․중국의 구법여행에서 초기 선종사의 영향은 물론이거니와 그 맛을 보았을 것이다. 아무튼 원표대덕은 초기선종의 육조의 제자들과 중국 대륙을 동시대에 살다간 인물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원표대사(중국 활동시기, 天寶年間, 742∼756)
원표대사 장생표주(長生標柱) 세운 시기(경덕왕 17년, 759)
무상선사(淨衆無相, 684∼762)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
하택신회(河澤神會, 670∼762)
청원행사(靑原行思, ?∼ 740)
도의국사(道義, 738∼821)
보조체징(普照體澄, 804∼880)
3. 도의국사 및 보조체징
신라 말 입당 구법 승 가운데 가장 먼저 귀국한 선종승려는 현재 조계종 종조인 도의(道義: 738∼821 생물연대 미상)국사이다. 구산선문의 제 1문이 바로 도의의 가지산문(迦智山門)이다. 도의국사는 당(唐)에서 37년간 수학하고 귀국한다. 그는 마조도일의 법(法)을 계승한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으로부터 승인을 받고 821년(헌덕왕 13년)에 신라로 돌아와서 남종선의 깃발을 처음 내건다.
도의선사는 귀국 후 기존 교학불교계의 반발에 직면하게 되어 설악산 양양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하게 된다. 아직 신라에서는 선종의 ‘불립문자(不立文字) 견성오도(見性悟道)’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남종선의 심인법(心印法)은 아직 생소했던 것이다. 그가 명주(溟洲: 지금의 강릉)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것도 강원도에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도의의 남종선은 당대에는 크게 떨치지 못했는데 그의 제자인 염거(廉居)가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서 조사의 마음을 전했고, 이어 염거의 제자인 보조체징대사(普照體澄, 804∼880)에 의해 빛을 보고 꽃을 피우게 된다. 가지산문은 3대에 이르러 제대로 이름을 얻게 된 셈이다.
도의국사의 중국 내 행적을 보면 먼저 오대산 문수보살을 예참한다. 이때 허공에서 종소리가 나서 산을 울리는 메아리를 듣게 되고, 신기한 새인 신조(神鳥)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문수보살로부터 감응을 얻었다고 한다. 오대산은 신라 승려들과 인연이 많은 절이다. 본래 문수보살로부터 수기를 받은 사찰로서 일찍이 자장율사도 여기서 공부를 한 바 있다.
도의는 다시 광부(廣府) 보단사(寶檀寺)로 발길을 돌린다. 보단사는 육조 혜능이 ‘육조단경(六曹壇經)’을 설한 곳이다. 여기서 구족계를 받고 다시 육조 혜능(慧能, 638∼713)의 주석처로 알려진 본산인 조계산(曹溪山)으로 향한다. 이때 또한 신통한 일들이 벌어졌다. 조사당에 참배를 드리려고 하자 갑자기 문이 열렸다. 이에 절을 세 번하니 문이 저절로 닫혔다.
도의는 당시 선종의 기치를 높이 들고 선문을 명성을 떨치고 있던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로 가서 서당 지장에게 가르침을 묻는다. 서당지장은 마조의 교화도량인 개원사를 물려받고 제자들을 기르고 있었다. 서당은 특히 제자들 가운데 동이계의 신라승려들이 많았다.
서당은 도의에게 인가를 하면서 “진실로 법을 전한다면 이런 사람 아니고 누구에게 전하랴.”라고 하면서 법명을 ‘도의’(道義)라고 한다. 이때 도의라는 이름이 세상에 드러난다. 도의는 다시 두타행을 벌이던 중 마조의 선(禪)을 이어받은 백장회해(百丈懷海)을 만난다.
백장은 그를 보자마자 “강서(江西)의 선맥이 모두 동국으로 가는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백장은 서당에 비해서는 중국 쪽의 안타까움을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백장의 문하에서는 나중에 중국 남종선을 짊어지는 선승들이 이어진다. 백장의 선문은 황벽희운, 임제의현 등으로 이어져 오늘날 한국 조계종의 임제종 득세의 바탕을 마련하게 된다.
도의는 마조의 뛰어난 제자 두 분을 만난 셈이다. 흔히 서당지장이 마조의 경(經)을 이었고, 백장회해는 선(禪)을 이었고, 남전보원은 사물을 보는 법(사물에서 깨달음을 얻는 법)을 이었다고 한다.
신라 유학승들에게 가장 많은 인가를 해준 선승은 서당지장이다. 마치 서당지장은 신라의 구산선문을 위해서 존재한 듯하다. 왜냐하면 구선선문의 스승으로서의 역할 이후에 그는 중국 선종사에서 증발되기 때문이다. 마조의 ‘세 달(月)’로 알려진 3제자 가운데 서당은 이상하게도 중국 선종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가 ‘동이족’이었다는 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아무래도 동족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달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도의국사의 일대기는 ‘지증대사 적조탑비(智證大師 寂照塔碑)’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821년에 이르러 도의국사가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가 서당의 심오한 종지를 보았다. 지혜의 빛이 지장선사와 비등해서 돌아왔으니, 처음으로 선종을 전한 분이다. 그러나 원숭이의 마음으로 분주한 망상에 사로잡힌 무리들이 남쪽을 향해 북쪽으로 달리는 잘못을 감싸고, 메추라기의 날개를 자랑하는 무리들이 남해를 횡단하려는 대붕(大鵬)의 큰 뜻을 비웃었다. 이미 말을 암송하는 데만 마음이 쏠려 다투고 비웃으며 마구니의 말이라 하는 까닭에 빛을 지붕 아래 숨기고, 종적을 깊은 곳에 감추었다. 신라의 왕성(동해의 동쪽)으로 갈 생각을 그만두고 마침내 북산(北山, 설악산)에 은거하였다. ‘주역(周易)’에서 말한 ‘세상을 피해 살아도 근심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으며,‘중용(中庸)’에서 말한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아도 뉘우침이 없다’ 는 것이 아니겠는가. 꽃이 겨울 산봉우리에서 빼어나 선정의 숲에서 향기를 풍기매, 개미가 고기 있는 곳에 모여들 듯이 도를 사모하여 산을 메웠으며, 교화를 받고는 마침내 선법을 이은 사람이 산을 나섰으니, 도는 인력으로 폐지할 수 없는 때가 되어야 마땅히 행해지는 것이다.”
당시 도의국사의 선사상은 화엄불교에 빠져있는 신라에서 쉽게 이해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선학과 선풍을 배우려고 뜻있는 승려들이 몰려들었던 것 같다.
보조국사 체징에 이르러 전라남도 장흥 가지산에 보림사(寶林寺)가 들어서고 본격적인 해동선맥을 형성하게 된다. ‘보림’이라는 이름은 바로 선종의 법계를 뜻하는 것으로 중심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선종이라는 명칭은 9세기 후반에 등장하고, 도의가 조계종을 창건한 것은 아니지만, 그로부터 선종이 발원하였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도의국사는 서당지장의 극찬을 받은 선사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서당은 마조의 법을 계승한 당대 최고의 선사였기 때문이다.
마조도일의 제 1차 전기 자료로 권덕여(權德輿, 759∼818)가 저술한 ‘홍주개원사석문도일선사탑비명병서(洪州開元寺石門道一禪師塔碑銘幷序)’라는 문서가 있다. 이는 마조가 열반한지 3년만(791년)에 지은 것이다. 따라서 가장 신빙성이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조의 많은 제자들 가운데 십대제자로 혜해(慧海), 지장(智藏) 등만 나온다. 후에 마조문하를 대표하는 백장회해(百丈懷海), 남전보원(南泉普願) 등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당대에 마조문하의 수제자는 ‘돈오입도요문론’의 저자로 알려진 대주혜해(大珠慧海)와 서당지장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두 인물 중에서 서당이 앞선다고 추측할 수 있다. 서당(西堂)이라는 이름 자체가 선원에서는 주지(방장) 다음의 상석이기 때문이다. 백장회해가 마조의 제자로 부각된 것은 송(宋)대의 일이다. 이는 백장의 제자가 출중하였기 때문이다. 즉 마조-백장-황벽-임제에 이르는 사자(師資相承)의 맥에 의해 부각되는 것이다. 선종 맥의 부활은 실은 스승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제자가 결정하는 셈이다.
송본(宋本) ‘전등록’에는 ‘마조완월’에 서당과 백장만이 등장하다가 명본(明本) ‘전등록’에 이르러 남전보원(南泉普願)이 가세하게 되는데 조주(趙州)에 의해 남전이 부활하는 것이다. 전등록의 부활이라는 것도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다.
동류지설에서 서당지장이 중요한 것은 그의 문하에서 도의, 혜철, 홍척 등의 구산선문 중 3 문이 발원하기 때문이다. 홍척(洪陟)의 실상산문(實相山門, 남원 실상사)과 혜철(體空慧哲, 785∼861)의 동리산문(桐裏山門, 곡성 태안사) 그리고 체징(普照體澄, 804∼880, 도의선사의 손자상좌)의 가지산문(迦智山門, 장흥 보림사)이 서당지장의 직계라 하겠다. 아홉 산문 중 세 산문이 지장의 법손인 것이다.
서당이 동이족이기 때문에 중국 선종사에서 점차 사라졌다기보다는 후대에 제자들이 받쳐주지 않고, 그나마 훌륭한 제자들은 모두 신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4. 선차정신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
―심물존재, 심물자연의 입장에서 본 선차정신
선차(禪茶)는 차만 있어서도 안 되고, 선만 있어서도 안 된다. 선차는 현대의 철학적 존재론으로 볼 때 바로 심물론(心物論)으로 대응된다. ‘선(禪)=마음(心)’이고, ‘차(茶)=물(物)’이다.
서구의 이원론 철학, 즉 정신과 물질(육체)의 이분법의 영향으로 인해 심(心)과 물(物)이 둘인 것 같지만 실지로 동양적 전통에서는 심물은 본래 하나였다. 말하자면 심물은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인 셈이다. 이러한 전통 위에서 선차일여, 다선일여 사상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중국과 한국의 선차는 상호 교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물론 차는 중국이 원산지이지만 양국은 역사적으로 전하고 다시 전해 받는 특성을 보인다.
예컨대 김지장(金地藏) 스님이 중국 안휘성 구화산에 전했다고 하는 신라의 차나무는 오늘날 구화산 일대의 불차(佛茶)의 맛으로 살아나고 있다. 불차의 맛은 한국의 일반적인 차맛과 공통점을 보인다. 양국 간에는 토양과 법제의 차이가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관통하는 맛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또 대렴(大廉)이 신라 흥덕왕 3년(828년) 절강성 천태산에서 가지고 와 지리산기슭에 심었다는 차는 오늘날 한국 차나무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절강성의 차와 한국의 차는 DNA분석에서도 증명되었지만, 성분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전남 장흥 가지산 보림사의 차맛은 중국 복건성 지제산의 차맛과 거의 같다. 중국 복건성 영덕(寧德) 지제산(支堤山)과 한국의 장흥 가지산은 매우 닮은꼴이다. 최석환은 이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755년 경 원표 대사가 신라로 돌아온 뒤 닝더의 가람형태와 닮은 입지를 찾아 나섰다. 원표는 무주를 거쳐 천관산에 이르렀다. 다시 가지산에 이르러 닝너 천관대와 가람입지와 닮은 것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 고가지사를 세웠다. 그곳이 보림사에서 떨어진 고가지사다. 그 자리에는 지금 원당암이 서 있다. 원당은 원표의 원자를 따서 세운 것이라고 전해 온다. 《보림사사적기》에 세 곳의 삼보림이 있는데 하나는 서역에 있고 또 하나는 중국에 있고 나머지 하나는 동방에 있다고 했다. 월지국의 보림의 형태를 따서 보림사를 건립했다고 하는데 보림사의 가람은 닝더 천관산 천관대의 가람형태를 따서 지은 절이 분명해진다. 장흥에 전해오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정명 국사 천인의 《천관사기》, 위백규의 《지제지》, 서거정의 《지제사기》 등에도 원표 대사가 닝더의 곽동에 머물렀던 천관산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언론인이며 차 연구가인 공종원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원표가 보림사를 창건하였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지명과 산명과 지세 지형이 중국과 한국이 너무나 흡사하다는 점이다. 원표가 활동하던 중국의 산과 절이 신라 무주(지금 장흥) 땅에 재현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면 그 점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보림사라는 절 이름이 육조혜능이 주석하였던 중국 쑤저우 조계산의 보림사에서 기인하였다는 것은 ‘보조 선사 창성탑비’에도 설명되어있다. 원표 스님이 처음에 ‘보림’이라는 이름을 썼던 것을 보조체징도 이를 이어받았다는 말도 있다. 거기에 장흥에는 천관산(天冠山)이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원표 대사가 천관보살을 뵙기 위해 올랐던 중국 곽동의 ‘천관대(天冠臺)’를 장흥 땅에 재현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천관산 부의 남쪽 52리에 있다. 예전에는 천풍(天風)이라 불렀고, 혹은 지제(支提)라고도 하였는데 몹시 높고 험하여 가끔 흰 연기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서린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그는 또 “큰 지제사가 신라 장흥에 세워지지는 못했지만 천관산에는 영통화상(靈通和尙)이 세운 천관사라는 절도 있었고 선암사 옥룡사, 미타암도 있었다. 보림사가 있는 가지산에도 ‘가지사’라는 절이 있었다. 이것이 원래 원표가 세웠던 절이 아닐까 한다.”고 말한다.
지제산과 가지산은 둘 다 산세가 겹겹이 연꽃으로 둘러싸여 있는 듯하고, 산은 토산이다. 둘 다 암산은 아니다. 능선의 모양도 부드러운 굴곡을 이루며 닮아있다. 지제산의 정상에는 천관대(天冠臺)라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 반면 가지산에는 바위가 없다. 물론 지제산의 천관이라는 말은 천관보살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의 지리산은 중국 영덕 지제산의 산명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한국식으로 부른 이름이거나 음운이 변천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의 지리산은 그 곳에 화엄사가 자리한 것을 비롯하여 숫제 불교산이라고 불릴 만하다.
한국의 사찰들은 대체로 중국과 비슷한 산세를 찾아서 사찰을 짓곤 했다. 예컨대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중국의 화엄(華嚴) 성지(聖地)인 산시성(山西省)의 오대산(五臺山)을 닮아있는 것이 한국의 오대산이다. 구산선문의 여러 사찰들도 중국의 선종 산문을 닮아있다. 이는 아마도 비슷한 산세에서 스승과 가르침을 흠모한 까닭인지 모를 일이다.
중국의 지제산과 한국의 가지산이 비슷한 경관이라는 것은 보림사와 원표의 관계를 강화시켜주는 요소이다.
더욱이 지제산에서 생산되는 차와 보림사의 차가 맛이 같고 법제하는 것이 같다면 이것 또한 원표대사와의 관계를 강화시켜 준다. 보림사는 그 후 구증구포(九蒸九曝) 방식의 진원지로서도 자리매김한다. 보림사는 차의 생산과 차 맛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 것으로 보인다.
이유원의《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보림사의 우전차 맛은 중국의 푸얼차 못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도 홍현주(洪顯周, 1793∼1865)에게 스승 완호의 탑명을 부탁할 때 봉례품으로 보림사 차를 선물하였다.
“1830년에 스승 완호의 사리탑 기문을 받기 위해 예물로 가져간 것이 보림백모 떡차였다. 우연히 벗을 통해 이 차의 맛을 보게 된 박영보가 <남차병서>를 지어 사귐을 청하고, 초의가 이에 화답함으로써 초의차가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그의 스승 신위가 다시 <남차시>를 지어 그 차 맛을 격찬하며 전다박사로 추켜세우자, 초의의 명성은 경향 간에 드높게 퍼져나갔다.”
그 뿐인가. 초의가 ≪동다송(東茶頌)≫을 쓰게 된 동기도 해거도인(海居道人) 홍현주가 차를 만드는 법을 물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였다. 보림사 차는 한국 근대 차 문화부흥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보림사 차는 초의를 세상에 차인으로 드러낸 차였다. 초의를 출세시킨 차는 대둔사 차가 아니었다. 그만큼 보림사는 한국 전통차문화의 중심으로 부각되어야 마땅한 곳이다.
허흥식은 장흥 일원이 차 생산중심지일 가능성도 점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고려 말기와 조선초기의 차의 생산지를 가장 자세하게 전하는 믿을만한 기록이다. 장흥에만 뚜렷하게 가장 많은 차소(茶所)가 수록되었다.”
지제산 차와 보림사 차의 연관성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최석환이다. 그는 현지조사를 통해 푸젠성 닝더 화엄사에서 한국의 덖음차의 원형을 발견했다. 보림사 차의 삼증삼쇄(三蒸三灑)의 방식을 거기서 발견한 것이다.
“차를 만드는 고수인 당렌(설人) 스님이 공양간 2층 다락에서 차 2kg을 가지고 내려왔다. 그는 시종일관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차 덖는 데 있어 귀신이라는 소리를 듣는 시엔신(現信) 스님의 눈빛이 빛났다. 그 뒤를 당렌 스님, 쉬마오(釋妙), 시엔하오(現號), 양진광(楊金光), 첸시엔좌이(陳仙宅) 거사가 따랐다. 먼저 양진광 거사가 가마솥을 달궜다. 온도는 100도씨를 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불의 온도가 높으면 찻잎이 손상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찻잎을 애인 다루듯 해야 한다는 것이 중국 제다의 불문율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230 300도씨 고온의 솥에서 차를 덖는데 중국은 100도씨를 유지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는 또 “놀라운 것은 우리 식으로 빨래하듯 차를 비비지 않았다는 점이다. 찻잎이 손상되지 않게 공을 굴리듯이 덖어냈다. 시엔스 스님에게 연유를 묻자 찻잎을 굴리듯 덖지 않으면 파괴되어 차맛이 써져 차를 마실 수 없다고 답했다. 그리고 덖은 찻잎을 위아래로 높이 들어 올리며 말렸다. 두 번째 찻잎이 가마솥에 들어갔고 첫 번째와 똑같은 방법으로 차 주걱을 이용, 맨손으로 찻잎을 덖었다. 그렇게 세 번을 가마솥에 찻잎을 넣었다가 세 번을 덖으며 마무리되었다. (중략) 차를 덖은 뒤 그 자리에서 뜨거운 물을 붓고 차맛을 감별했다. ‘아! 이 맛은 1988년 봄 보림사 사하촌에서 이정애 할머니가 우려낸 그 차 맛이 아니던가?”라고 말했다.
그는 ‘차의 세계’와 ‘선문화’에 여러 차례 원표대사와 제다와 관련한 르포기사와 에세이를 발표했다.
보림사 차는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가 발견됨에 따라 유명해졌다. 이유원은 여기서 보림사의 제다법을 ‘구중구포’ 방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구중구포는 그동안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이 기록으로 인해 사실임이 증명됐다.
초의 의순이 서울의 양반들에게 차를 선물할 때 보림사 차를 선물하였다는 기록이 ‘임하필기’(32권)‘삼여탑(三如塔)’에 나온다.
“대둔사(大芚寺) 승려 초의(草衣)가 그의 선사인 완호(琓虎) 대사를 위하여 삼여탑을 건립한 다음 도위(都尉) 해거(海居) 홍현주(洪顯周)에게 명(銘)과 시(詩)를 부탁하고 자하(紫霞) 신위(申緯)에게 서문을 부탁하면서 보림차(寶林茶)를 선물하였다.(중략) 보림차는 강진(康津)의 죽전(竹田)에서 생산되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품질이다.”
“강진 보림사 대밭의 차는 열수 정약용이 체득하여 절의 승려에게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품질은 푸얼차 못지않으며 곡우 전에 채취한 것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 이는 우전차(雨前茶)라고 해도 될 것이다.”
보림사 차 맛은 대단한 명성을 누렸던 것 같다. 초의는 자신이 직접 차를 재배하고 법제했는데 왜 자기 차는 그만두고 보림사 차를 한양으로 가져갔을까. 적어도 자신이 만든 차보다는 보림차의 명성이 높았던 것 같다. 귀한 분들에게 귀한 선물을 하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이다.
이유원은 ‘가오고략 (嘉梧藁略)’ ‘귤산문고(橘山文稿)’ ‘임하필기(林下筆記’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유원은 쇄국정책의 대원군과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웠는데 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영의정에 올랐으나 벼슬에서 은퇴한 뒤에 다옥(茶屋)을 짓고 차를 즐긴 차인이다. 그는 1859년 46세 때에 지금의 남양주시 화도읍 수동면 가곡리 가오곡(嘉梧谷)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곳에 장서각(藏書閣)과 다옥(茶屋)을 짓고, 만년 은거의 계획을 세웠다. 그의‘가곡다옥기(嘉谷茶屋記)’에 차 애호의 변과 다옥에 대한 설명은 차에 대한 그의 사랑과 깊이를 읽게 한다. 그는 다산 정약용이 제법을 가르쳐준 보림사 죽로차(竹露茶)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사람이다. 그는 또 우리 차와 일본차, 그리고 중국차에 관한 풍부한 기록도 남겼다.
이유원의 임하필기의 ‘호남사중(湖南四種)’에는 중국 원난의 푸얼차와 장흥 보림사 죽로차를 비교하는 부분도 있다.
보림사 차는 이유원의 기록 등으로 한국 차사의 여러 문제를 푸는 키가 되었다. 보림사는 최근 청태전의 출발점이 되면서 그 옛날 차의 명성을 되찾고 있다. 보림차는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청태전으로 발전한 것 같다.
최석환 차 연구가에 따르면 “2009년 3월 5일 중국 푸젠성 닝더의 화엄사 후이징(惠淨) 스님이 권한 차 맛은 1998년 봄 보림사 사하촌 이정애 할머니가 내놓았던 차 맛과 같았다. 나중에 푸딩(福鼎) 자국사 주지 시엔즈(賢志) 스님은 원표대사가 인도에서 닝더(寧德)의 지제산(支提山)에 이른 후 깊은 산속에서 ‘나무 열매를 달여 마셨다.’는 기록을 들어 원표가 마신 나무는 차(茶)일 가능성이 크다고 제시했다.”고 한다.
이 말이 옳다면 원표는 화엄신앙만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차도 가지고 왔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김지장스님이 자신이 먹던 차맛을 잊지 못해 구화산에 차나무를 가지고 갔듯이 원표스님이 신라로 돌아오면서 영덕에서 차 나무를 가지고 왔을 가능성인 높다. 차는 또한 한 번 마시면 중독성이 강할 뿐만 아니라 선종이 중국과 한국에 유행할 즈음, 차도 함께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은 크게 무리가 아니다. 이에 따라 학자들의 문헌사료의 발굴이 요청된다 하겠다. 만약 보림사의 차가 원표대사가 들여온 차라는 것이 증명된다면 조선 후기에 머물던 보림사 차사는 신라 말로 껑충 뛰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