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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6-19 16:52
발표 논문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054  
삼국사기 차 기록의 의문점
 
                                                  
차의 역사에서 최소의 요건
역사는 삼간이 일치한 예술이다. 삼간이라면 초가삼간이 기억에 떠오르지만 시간과 공간과 인간을 말한다. 초가삼간은 가장 원초적이고 단순한 공간이고 “양친부모를 모셔다가 천년 만년 실고지고”라는 동요에 등장한다. 집을 짓고 부모를 모실 생각을 하였으면 철이든 성년이고 부모도 늙었다.
위의 동요는 자장가이다. 자장가는 유명한 서양의 음악가도 부모의 장례 날 불렀다는데 왕조국가에서는 평균수명이 짧아서 대가족을 이루어 서로 돌보며 뭉쳐서 살았다. 성년은 겨를 없이 일하고 자식을 출산하여 대를 이어 왔다. 자장가를 지어서 부르며 아기를 키우는 담당은 출산한 부모이기보다 조부모이고 조부모가 없으면 10세를 전후한 누이나 형이 이웃 할머니와 함께 자장가 집단을 이루어 동생을 돌보며 따라 불렀다고 해석하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위의 자장가에는 초가와 부모가 등장한다. 삼간에서 시간은 예술인 음악에 가깝다면 초가란 소박한 공간이고 부모와 동생은 인간이다. 삼간이란 필수불가결의 최소한의 공간이고 여기에 인간과 시간과 공간이 합치면 역사의 현장을 이룬다. 신문의 기사에 육하원칙이란 조건을 요구하지만 이를 더 줄인다면 삼간이라고 하겠다. 헌법도 간단할수록 이상사회였다고 하며 8조였던 이상향의 시대가 있었다지만 건국초기에는 약법삼장으로 더욱 단순화한 시기도 있었다.
역사란 삼간이 가장 기초일 뿐이고 다른 조건도 다수 작용한다. 가장 큰 조건은 시대의 여건과 대세이다. 차의 역사에서도 조건은 마찬가지이다. 삼국지연의에는 차가 황하유역의 민간에도 판매되고 돗자리를 팔아 차를 사는 몰락한 황족의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있을 수없는 대세이다. 송나라나 가능하고 실제로 삼국지연의에는 몽골제국의 통치를 받던 시기의 전술이 많이 포함되었다. 특히 북방의 소수민족에 대한 다수의 한족을 중심한 정통론이 민간의 저항을 고조시키면서 명의 몽골제국에 대한 혐오를 반영하였다. 조선에서도 삼국지연의는 반청의식을 고취하는 소중화를 내세운 시기에 널리 읽혔다.
 
삼국사기 차의 기록
 
삼국사기에 대하여 삼국유사보다 낮추 평가하는 경향이 한때 유행하였다. 50권의 분량으로나 내용으로도 5권인 삼국유사에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다만 상고의 신화에 대한 기록이 없는 단대사인 삼국사이고, 사실을 엄선한 자세가 다양한 현대의 역사연구와는 다른 전통시대 정치사 중심의 경직성을 나타낸다. 사실이란 당시의 기록이고 후대에 설명이란 사관이나 신화와 전설, 설화나 민담에 가깝다.
삼국유사는 차에 대해서도 많은 설화를 수록하였으므로 삼국사기와는 사뭇 다르다. 삼국유사는 스님이 지은 만큼 차를 공양에 사용한 이야기가 많다. 동아시아에서 불교에 앞서 동물을 희생으로 제의를 수행하거나 인신공양의 순장도 있었다. 신라의 우물에서 개와 어린이의 뼈가 나왔고 이는 단순한 사고의 흔적이 아니라 기우제와 같은 제의에 희생을 사용하였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상서(尙書)의 여오(旅獒)와 예기(禮記)의 갱헌(羹獻), 논어의 추구(芻狗) 등은 모두 히말라야 동쪽 기슭에서 생산된 장오(藏獒)와 관련이 있다. 촉지방의 오늘날 장오를 제물로 사용하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조선시대의 고전인 유학경전에 지식이 깊었던 성리학자들은 가장(家獐)을 가례와 국가의 제례에 사용하자고 적극 주장하였고 어느 정도 실현하였다. 유일한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초복에도 가장을 특식으로 제공하였고 효도의 대표적 군왕인 정조는 수원의 장릉에 행차하고 모당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에도 쪄낸 가장을 사용하였다.
불교는 이와 달리 차와 과일을 제례의 주된 제물로 사용하였다. 곡식은 모든 종교에서 기본으로 사용하였지만 유교의 제의는 상고의 희생에서 기원하였다. 고대후반부터 중세까지는 불교이고 근세는 성리학이 주된 사상이었고 제물에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신라의 불교에 대하여 자세하게 서술한 삼국유사에는 차에 대해서도 삼국사기보다 다양한 기록을 실었다. 다만 차를 재식한 대렴(大廉)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만 실려 있고 삼국유사에는 대렴은 나오지만 그가 차를 심었다는 이야기는 빠져 있다.
삼국사기에만 차를 지리산에 재식한 대렴과 연결시켰다. 이를 해석한 대표적인 번역서와 해석서는 본문을 읽는 방법에 많은 차이가 있다. 다만 모든 차의 연구자들도 기존의 번역과 해석에 의문을 제시한 글은 거의 없다. 차의 재식에 대한 기록을 본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828년 겨울 12월에 당 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당의) 문종 (文宗)이 인덕전(麟德殿)에 불러 대면하고 연회를 베풀어 주었으며 차등을 두어 하사품을 내렸다. 입당(入唐)했다 돌아온 사신 대렴 (大廉)이 차(茶)의 씨앗을 가지고 오고, 왕은 지리산 (地理山) 에 심도록 하였다. 차는 선덕왕 (善德王)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행하였다.
 
위의 번역은 여러 차례 시도된 삼국사기의 역주를 토대로 가장 최근까지 역주를 종합된 결과이다. 지금까지 차의 처음 재배에 대한 자료와 해석은 이를 기준으로 삼을 정도이다. 삼국사기에 대하여 여러 차례 역주본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방대한 시기를 담은 엉성한 자료를 제대로 의미를 가지게 해석하기는 쉽지 않으므로 최후에 가장 방대한 번역과 주석을 종합하고 정밀한 수준을 도달하는 과정에 있다.
 
차가 성행한 흥덕왕 시대
차란 단기간에 생산이 가능한 재배와 확산이 빠른 식물이 아니다. 더구나 씨를 가지고 발아시키고 이를 성장시키고 가꾸는 과정에서 아주 오랜 세월이 요구되는 장기간 인내와 고도의 기술이 요구된다. 그래서 김부식도 이미 선덕왕 시대(재위632-646)도 있었지만 흥덕왕 828년에 이르러 성행하였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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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치원이 짓고 쓴 쌍계사 진감선사비문, 진간선사 혜소는 830년 이곳에 머물기 시작하였고 이 비는 차의 시배지란 확신을 심었다.
 
 
차를 200년 가까이 수입만 해서 마시고 그동안 재배할 줄을 몰랐다고 말하기도 조금 구차하다. 굳이 위의 사료를 그대로 신빙성을 가지려면 선덕왕 때까지는 가공된 수입한 차를 마셨고 흥덕왕 3년에 이르러 재배가 시작되었다면 조금 납득이 간다. 그러나 흥덕왕 3년에 이르러 성행하였다고 표현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차를 생산하여 공급하려면 아무리 성공적으로 재식해도 거름과 농업기술이 널리 알려진 오늘날에도 30년은 소요되고 신라에서는 적어도 50년 이상 걸려야 성행되었다고 해석해야 옳지 않을까?
흥덕왕대보다 적어도 50년은 앞서 대렴이 심었다고 해야 맞지 않을까? 828년 차 이야기는 차를 재식한 다음 훨씬 후에 있었던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사신으로 갔던 대렴의 관직도 없고 차가 성행한 이야기가 위주라면 훨씬 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흥덕왕의 치세란 진골내의 세력분열과 갈등의 첫 번째 회오리가 불었던 혜공왕의 치세를 지나 청해진의 장보고가 먼저 깃발을 올리고 전국의 민란이 일어나 당과 함께 동아시아는 다시 난세의 도가니로 변하기 직전이었다.
이를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그대로 인용하지 않았다. 그는 줄기를 세우고 세부 설명으로 나눈 강목체를 사용하였다. 다만 내용이 이상하다고 보고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안정복은 위의 자료를 하나의 사실을 기록한 기사로 읽지 않고 두 가지 사실로 나누어 실었다. 이를 민족문화추진위원회의 후신인 고전국역원에서 제공한 번역본에서 번역을 함께 실으면 다음과 같다.
 
○ 동12월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김대렴(金大廉)을 당에 보냈다. 황제가 인덕전(麟德殿)에서 불러 보고 규정대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 차 종자(茶種子)를 지리산(地理山)에 심었다.
동방에는 옛날에 차가 없었다가 선덕왕 때부터 먹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당에 건너갔던 사신 김대렴이 차의 종자를 가져왔으므로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이로부터 차가 성하게 되었다.
 
인덕전은 당의 대명궁에 속하고 국가의 가례(嘉禮)와 외국의 사신을 접대한 만찬이 자주 열렸던 곳이다. 이곳의 연회에서 여러 지역의 음악이 연주되었고 위의 기록은 사실성이 크다. 두 가지 사실을 전하는 문장으로 나눈 안정복의 고심한 모습이 엿보인다. 그리고 이를 번역한 민족문화주친회의 노력도 볼만하다. 그러나 이를 철저히 규명하지 않았다. 안정복은 글자를 바꾸고 문장을 나누었고 후대의 번역에서는 선덕왕 시대까지는 가공된 수입한 차를 마셨고 재배는 흥덕왕시대에 시대에 시작되었다는 해석이다.
삼국사기에는 대렴이라고 하였지만 안정복은 김대렴이라고 하였다. 이무렵 신라 왕실의 핵심은 거의 김씨였고 외국에 사신으로 다녀올 정도로 신임을 받는 인물이면 김씨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다, 다만 후에 위씨나 소씨 등이 이름에서 첫 글자를 따서 생긴 사례가 확인되지만 동성근친혼을 피하는 당나라의 사회제도를 따르는 외교상의 편법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동사강목에서 별개의 두 가지 사실로 보았던 사료의 해석을 선덕왕시에도 차가 있었다는 부분을 마셨다는 해석도 각주를 붙일 만큼 새로운 견해이다. 다만 안정복이 두 가지 사실로 해석하면서 대렴에게 성을 붙였고 문장을 나누고 글자도 적지 않게 바꾸었다. 이 부분은 더욱 심오한 해석이 필요하고 안정복도 자신의 의견인 안설(按說)을 불일만한 부분이었다. 대렴은 이보다 앞선 혜공왕 3년에도 대공(大恭)의 동생으로 등장한다. 안정복은 그곳의 대렴과 구분하거나 같은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는 엇갈린 견해를 유보하고 다시 손을 쓰지 못하였다면 나의 지나친 해석일까?
 
차의 시배와 원표와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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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화엄사 부근의 장죽전에 있는 차시배지 기념비. 이곳에서는 쌍계사 부근의 시배지라는 주장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차란 정착이 어려운 장기간 끈기가 필요한 식물이고 흥덕왕 3년의 기록에 무언가 빠진 아쉬움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런 부분이 적지 않다. 김부식은 설화처럼 전하는 부분을 삭제한 철저한 사실 위주의 역사가였다. 그런데 김부식보다 차에 더욱 많은 설화를 남긴 일연은 대렴의 차 재배에 대한 기록의 전체를 싣지 않았다. 차를 생활에 깊이 사용한 고승이 차의 재배에도 더 많이 관심을 가졌을 터이고, 실제로 삼국유사에는 차의 사용에 대한 설화에 가까운 삼국의 차 이야기를 삼국사기보다 더 많이 실었다.
사신이란 공인된 세작(細作:諜者)이고 발해와 남북으로 대치한 상황에서 신임을 받는 측근이 아니고는 발탁되기 어려운 탁월한 존재이지만 그의 직함도 없다. 무언가 앞뒤로 일정한 부분이 빠진 기록이고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이를 수록하지 못할 자료로 간주하였다고 하겠다. 삼국사기에는 대렴이 형인 대공과 함께 혜공왕 4년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형제의 관위가 모두 실리고 혜공왕의 치세에 자주 있었던 반란의 발단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간단히 실었다.
 
혜공왕 4년 7월에 일길찬 대공 (大恭) 아우 아찬 대렴 (大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모아 33일간 왕궁을 에워쌌으나 왕의 군사가 이를 쳐서 평정하고 구족의 목을 베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상통하는 대공의 난을 더욱 자세히 전하였다. 혜공왕 4년(767) 7월3일부터 30여 일간 형 각간 대공과 동생 아찬 대렴 형제가 일으킨 내란의 규모와 경제적 기반, 그리고 이를 처리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아주 자세하다.
7월 3일에 大恭 각간의 도적이 들고 일어나니 서울 및 5도의 주와 군에서 모두 96각간이 서로 싸운 커다란 내란이었다. 大恭 각간의 집이 멸망하였는데, 그 집의 재산과 보물과 비단을 왕궁으로 옮겼다. 신성의 장창은 불탔고 반역한 무리의 사량리와 모량리에 있던 보배와 곡식도 왕궁으로 실어 들였다. 난리는 30일을 채우고서야 겨우 그쳤다. 상을 받은 자들은 아주 많았고 목을 베어 죽임을 당한 자들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대공을 도적이라 표현한 삼국유사의 기록이 주목되고 일길찬을 각간으로 동생인 대렴은 이름이 없다. 그러나 반란이 시작된 날자와 33일을 30일을 채우고 라는 표현이 조금 차이가 있다. 대공은 많은 재물을 감추고서 반란을 일으켰던 듯하고 그를 추종한 반역의 무리나 죽임을 당한 자가 헤아리기 어렵다는 표현도 그의 동생을 포함한 수많은 혈연관계로 이어진 종합적인 부정축재의 꾸러미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들의 재산은 전국을 망라하는 서울과 5도에 연결된 도로망을 통하여 모아들었다. 귀중한 자산과 보배는 대공의 집으로, 무겁고 부피가 큰 곡식과 무기는 남산의 신성 장창에 두었고, 보물과 곡식은 사량리와 모량리에 두었음이 확인된다. 남산의 신성 장창은 군량미와 무기를 두는 곳이었다. 진평왕 때 처음 축조되었고 당과 협공하여 고구려를 처부시기 앞서 문무왕 3년 (663년) 1월에 우창과 좌장으로 확대하여 무기와 곡식을 두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신성장창의 규모가 더욱 자세하게 수록되었다.
대공과 대렴의 활동에 대한 다른 기록은 없다. 다만 전국의 교통망을 수도로 연결시켜 이용할 정도로 이들은 지방에도 거점을 확보하였음을 말한다. 대공은 각간으로 중앙에서 대렴은 아찬으로 사신으로 지나왔던 서남 해안의 요지를 장악하고 차를 심었을 가능성이 크다. 차는 혜공왕 초기까지 씨를 심었고 60여년 지난 흥덕왕 3년(828년)에는 성행하였다는 이야기의 일부가 빠졌다고 해석된다.
흥덕왕 3년에 사신이 가져온 차와 대렴이 60여 년 전에 심었던 차가 생산되어 비교하는 기록이 축약된 사료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삼국사기는 변화를 설명하는 부분이 기원으로 잘못 설명된 부분이 더러 있다. 진흥왕 말년에 여자 원화에서 남자 화랑으로 청소년 수련집단의 구성이 바뀌는 사실도 유사한 기록의 형태이다. 차의 처음 재배를 빼놓고 성행과 혼동되었듯이 화랑제도의 변화를 기원으로 기록된 부분이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삼국사기는 대렴을 두 번 등장시켰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형과 일으킨 반란은 이름을 넣지 않고 자세히 서술하였지만 차의 재배가 성행한 흥덕왕시대의 기록을 제외하였다. 설화적인 차의 사용마저 자세히 기록할 정도였던 저술의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일연은 이 부분에 대한 삼국사기의 내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셈이다. 60년 전에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 사신으로 이름을 다시 사용할 까닭이 없었다.
 
지리산의 처음 재배한 지역
 
차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금석문은 최치원이 짓고 글씨까지 남긴 쌍계사 진감선사비이다. 이 비문에서 최치원은 한명(漢茗)이란 명칭을 남겼다. 당의 차란 뜻이고 이 비는 쌍계사를 대렴이 차를 심은 곳이란 해석에 무게를 실어 주었다. 그리고 배후에 있는 청학동과 함께 명성을 높였다. 후에 구례의 화엄사에서도 남악신사를 모시고 멀지 않은 죽전에 차의 처음 심었다는 유적을 찾았다고 기념하였다.
장흥보림사에도 보조선사 체증의 비문이 있고 가지산문의 도의를 연결시킨 비문이 서있다. 그리고 그곳에도 비문에는 도의보다 앞선 시기에 귀국한 진표가 기반을 닦았다는 사실을 명시하였다. 원표는 바로 천보 연간(742-756)에 당나라에서 인도에 갔으므로 바로 당 현종이 촉으로 몽진했던 무렵의 전후였다. 그가 인도로 갈 길은 해로뿐이고 장안에서 육로로 인도에 갔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가 인도에서 머물렀던 곳과 활동도 알기 어렵지만 지제산의 기원도 궁금하다. 지제산은 인도와 복건 그리고 우리나라의 장흥에도 있다. 불교가 성하면서 산 이름은 인도에서 기원하고 육조와 당을 거치면서 사용된 명칭을 신라말기부터 한반도에서 사용한 경우가 많다. 보조선사 체증이 귀국한 시기는 회창법난과 함께 하였다.
당 현종의 몽진(755)과 무종의 회창법난(844)은 일세기에 가까운 기간이고 동아시아의 전체 역사에서도 중요하지만 불교사에서는 더욱 큰 전환기였다. 사막화도 육로가 막히고 북전불교의 소통이 막힌 시기였다. 촉으로 몽진한 황제는 촉에서 정중무상을 비롯한 선승을 만났고 차를 궁중의 음료로 고급 사교계에 소비를 확대하고 환도해서도 차를 멀리 운반하는 보급선을 확산시켰다.
원표가 당에서 다시 인도로 유학을 떠난 시기는 현종이 촉으로 몽진과 거의 같다. 그가 이용한 인도로 가는 길은 경직된 안사의 난이 일어난 북서의 육로가 아니고 남전불교가 전파한 해로임에 틀림이 없다. 귀국한 시기와 입적한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원표는 혜공왕 4년(767) 대공형제의 난을 전후한 시기에 앞서 대렴이 사신으로 지나면서 차를 심었던 지리산의 차의 재배와 상통하는 시기이다. 보림사의 보조선사 체증이 주지한 가지산은 원표의 옛터이고 원표의 법력이 국왕의 덕을 바로 세우는 정치에 도움을 주었다는 비문은 내란 이후에 도움이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다른 하나는 차의 생산이 확산되고 황하유역은 군사와 정치의 중심지일 뿐이고 양자강유역이 경제뿐 아니라 문화의 중심지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해로로 전파한 남전불교의 영향이 증대하고 신라의 해상교역과 양자강을 통한 외교가 활발하여 당의 문화가 황하유역보다 한반도로 유통과 축적이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회창법난은 교종에서 선종으로 불교의 분수령을 이루었고, 북종마저 몰락시키고 남종선이 번성하였다.
회창법난으로 귀국한 신라의 선승들은 모두가 남종을 표방하였고 선종과 함께 남종을 강조한 조계종의 명칭도 함께 쓰였다. 차는 남종에 날개를 달아주고 황하유역은 물론 한반도와 일본으로 전개되었다. 신라의 지방사원은 화엄종에서 선종으로 전환된 사원이 증가하였다. 원표가 귀국하여 개창한 보림사는 화엄사상의 비로자나불이 조성되고 도피안사와 금강산의 장안사에도 마찬가지로 화엄사상의 비로자나불을 조성한 다음 선종이 뒤를 이은 사찰이었다.
체증에게 신라의 헌안왕은 2년(859) 6월 장사현 부유수 김언경(長沙縣 副守 金彦卿)을 보내어 차약을 내리고 궁궐로 맞아들이고 보림사의 주지를 맡겼다. 이 무렵에는 수입차가 아닌 흥덕왕 때보다 더욱 성행한 지리산 기슭의 새해 차였을 가능성이 크다. 보림사의 주지는 앞서 원표가 이곳에 시도한 차의 재배와 가공을 더욱 향상시켰음을 반영하였다. 신라 차의 처음 재배는 당 현종의 촉으로 몽진과 관련이 있고 성행은 회창법난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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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비, 대공과 대렴 형제의 난이 끝난 직후 귀국한 원표의 행적이 실려 있다.
828년에 차가 성행하였다면 그 무렵 여러 곳에 차를 심었을 가능성이 있다. 대렴이 차를 처음 심었던 곳과 차가 성행한 지역은 같을 수도 있지만 다를 수도 있다. 차를 처음 재배한 공간보다 포함하는 범위가 넓으나 당나라로 사신이 왕래한 항구와 경주로 통하는 육로의 기점과도 상관이 크다. 흥덕왕시대에 차가 가장 성행한 지역과 처음 재배한 지역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삼국사기의 사소해 보이는 의문에 삼국유사와 동사강목을 비교하면 선인들도 이에 적지 않게 고심하였음이 확인된다. 단순한 사서의 기록일수록 대세와 합쳐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한 부분을 남겨두었다. 지리산 남쪽의 당과 통하는 신라의 항구로 가져온 소중한 차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차의 수입으로 소요되는 비용을 줄였다. 소량의 음료에도 끈질긴 노력과 인내를 통하여 국가와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열쇠가 담겨있다.